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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정리집

무지는 죄악이다.

by taskey 2025. 1. 4.

 

 

 

“제 불찰이었네요. 죄송합니다”

 

 내가 거주하는 아파트에는 2개의 버스 정류장이 있다. 정문 쪽에 하나. 큰 사거리의 정류장 하나. 나는 늘 정문 쪽에 있는 정류장을 사용한다. 도로변에 있는 정류장은 새 아파트로 이사 온 이후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었다. 때문에 존재하는 지도 몰랐던 정류장이었다. 그러나, 최근에 이 정류장을 알게 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내가 몰랐던 아파트의 비밀도 함께 말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학원의 등록이었다. 중요한 일을 해결하기 위하여 배워야 할 것이 있었다. 학원의 위치는 집으로부터 살짝 먼 거리에 있었다. 그렇기에, 학원에서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셔틀버스에 신청을 하였다. 나는 토요일 12시 반에 버스가 도착하니 정류장에 있으라는 학원의 연락을 받았다.

 

 그리고 사건 당일, 12시 반에 오기로 하였던 셔틀버스는 도착하지 않았다. 조금 늦게 도착하나 싶어 10분 가량을 더 기다렸으나 역시 오지 않았다. 문제가 있나 싶어서 곧장 학원에 전화를 걸었다.

 

 "왜 셔틀버스가 오지 않나요?"

 

 학원의 대답은 나를 당황하게 하였다.

 

 "정류장을 착각하신 것 같아요. 정문 쪽이 아니라, 사거리 쪽의 정류장이에요."

 

 순간적으로, 또 다른 정류장이 있음을 상기한 나는 곧장 얼굴을 붉히었다. 바보같이 실수한 상황에 창피해진 나는 2시 30분에 다음 셔틀버스를 타고 오라는 메시지를 듣고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다음 셔틀이 도착하는 시간까지, 인터넷으로 정류장의 위치를 파악하고, 간식도 먹으며 집에서 다시 기다렸다. 그리고 제대로 파악한 정류장의 위치로 나갔다.

 

 그런데 이상하였다. 2시 30분이 되었는데도 셔틀이 찾아오지 않는 것이었다. 알 수 없는 긴장감에 휩싸였다. 심장도 빠르게 뛰기 시작하였다. 식은땀을 흘리며, 버스가 빨리 오기를 기다렸다.

 

 31분, 32분… 35분… 40분………..45분.

 

 버스는 오지 않았다.

 

 핸드폰의 진동을 느끼니, 발신자에는 ㅇㅇ학원이 표시되어 있다.

 

 떨리는 손으로 받아보자, 전화 건너편에서 나를 질책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말을 하는 지도 모른 채, 그저 예, 예, 예 만 반복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의 진실을 듣게 되었다. 

 

 아파트에는 내가 몰랐던 제3의 정류장이 존재하였다. 

 

 어이없음, 부끄러움, 허탈감 등의 여러 감정을 느끼며 전화를 끊게 되었다. 

 

 힘없이 집으로 돌아온 후, 라면을 조용히 끓이기 시작하였다. 손에 든 핸드폰에는 학원에서 보내준 정류장의 위치가 나와있다. 인터넷에 검색해도 나오지 않던 그 위치에 분노를 삭이며 라면을 섭취했다. 스트레스 해소에 좋았다. 나는 조용히 생각을 해보았다. 

 

 역시 내 잘못이지. 아파트 입주민이 자기 아파트의 정류장을 몰랐던 것이 말이 안 되지. 괜히 스케줄 조정에 힘쓰게 하고 말이야. 미리미리 그 위치를 확인했었어야 했다. 

 

 아니다. 무지에서 비롯된 착각이 정말 잘못이라고 할 수가 있나? 이 상황이 정말 내 불찰이었다고? 제3의 정류장은 인터넷에도 나오지 않았으며, 그쪽 방면으로 가지 않는 한 위치상 알 수가 없었다. 모르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나는 그 학원에 '죄송합니다'라고 말할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다음부터 조심하겠다라고 말하는 것이 맞겠지. '죄송합니다'의 전제에는 '내가 특정한 잘못을 저질렀다'가 있다. 내가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잘못을 시인하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이상하다. 

 

 하지만 나의 무지와는 상관없이, 학원에 폐를 끼치게 된 것은 사실이다. 변명의 여지는 없다. 소크라테스도 이런 말을 하지 않았던가. 무지는 죄악이라고. 그렇다면, 결과 자체만을 보게 된다면 나는 잘못을 저지른 것이 확실하다. 원인이 무엇이 되었든 '죄송합니다'라는 표현하는 것이 맞지 않나? 술을 마신 채 모르고 음주운전을 한 것은 잘못이 맞다. 그 과정에는 인지가 없었더라도 결과로는 잘못이 맞다. 나 또한 이런 상황에 처한 것과 유사하다 할 수 있다.

 

 돌아가보자. 처음의 내 생각은 피할 수 없는 무지는 결과를 정당화할 수 있다 여기었다. 이것은 옳은가? 후자를 생각해보자. 후자의 생각은 피할 수 없던 무지여도 결과는 정당화할 수 없다 여기었다. 이것은 옳은가? 극단적인 예시를 들어보자. 사격 연습을 하던 A는 총을 발사하였다. 그 총알은 우연히 사격장을 떠나 그 건너에 있던 B의 머리를 관통하여 즉사에 이르게 하였다. 당연히 A는 사격장 건너에 있던 B의 존재를 인지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후에, 우연찮게 A는 살인을 저지르게 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였다. A는 스스로 자신에 대해 잘못이 없다 여길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으로는 어떤가. A는 이미 살인자가 되었다. 잘못을 범한 것이다. 

 

 마치 술을 마시고서 잘못이 없다고 변명하는 사람들과 같다. 인지를 못했다고 해서 스스로가 범한 사회적 잘못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잘못'이란 스스로가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가 판단하는 것이다. '죄송합니다'는 원인을 시인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결과를 시인하는 것이다. 책임을 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무지라든지, 착오라든지, 과정이라든지 그러한 것들은 알아줄 수가 없다. 나 또한 그렇다. 상대방을 볼 때 오로지 결과만 보고 판단한다.

 

 과정은 스스로에게 구속된다. 결과는 사회에 구속된다. 잘못은 사회에 묶여 있는 것이다. 

 

 무엇이 중요한가. 바로 '다음'을 만들지 않는 것이다. 피할 수 없는 무지로 벌어진 사고는 사회에 맡길 수 밖에 없다. '죄송합니다'는 사회적 책임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책임을 진 이후는 다르다. 인지하게 된 나는 생각할 수 있다.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없을 것이다.

 

 사람은 경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부여한 의미에 따라 자신을 결정하는 것이다. 

 

 세상이 한 층 더 밝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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